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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 (東國正韻, 국보 제142호)
조선 세종대인 1448년에 간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이다. ‘우리나라의 바른 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중국 명나라의 운서인 <홍무정운(洪武正韻)>에 대비된다. 총 6권 6책으로 된 활자본(活字本)으로, 전질을 소장한 곳은 건국대학교 박물관이 유일하다. 편찬에 참여한 인물은 신숙주(申叔舟, 1417∼1475),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최항(崔恒, 1409~1474),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이개(李塏, 1417∼1456), 강희안(姜希顔, 1417∼1464), 이현로(李賢老, ?∼1453), 조변안(曺變安, 1413∼1473), 김증(金曾, 1413∼1456)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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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선생가 분재기 (栗谷 李珥 先生家 分財記, 보물 제477호)
율곡 이이 선생 집안에서 형제간에 재산을 나눈 사실을 기록한 문서[分財記]이다. 조선시대 분재기는 아버지가 생전에 직접 재산을 분배하는 분급문기(分給文記)와, 아버지 사후 자식들이 모여 재산을 분배하는 화회문기(和會文記)가 있는데, 이 분재기는 화회문기에 속한다. 얼마 남아있지 않은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 전기 문서로 당시의 상속 분배 관행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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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서북학회회관 (상허기념관 常虛紀念館,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3호)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상허기념관은 건국대학교의 역사가 시작된 유서깊은 건물이다. 1946년 본 건물에서 우리학교의 모체인 ‘조선정치학관(朝鮮政治學舘)’이 창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건물은 본래 1908년 항일민족운동단체인 <서북학회(西北學會)>의 회관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오성학교, 협성실업학교 등 교육기관의 교사로 사용되다가 1941년경 우리 학교 설립자인 유석창 박사가 인수하였다.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위치하였던 것을 198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 복원하였다. 건물의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3년 6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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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궁 경원당 (都正宮 慶原堂, 서울시 민속자료 제9호)
도정궁 경원당은 19세기 조선 왕실의 종친 도정(都正) 이하전(李夏銓, 1842~1862)의 옛집으로 전해진다. 이하전은 선조(宣祖)의 생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13대 봉사손(奉祀孫)으로 1862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를 받아 사사(賜死)된 인물이다.
원래 위치는 종로구 사직동 262-85번지이었는데, 1979년 건국대학교 교정으로 이전됐다. 20세기 초에 지어진 건축물로 추정되며 건평 36.66평의 평면이 'ㄱ'자 형의 가옥이다. 벽체, 창호 처리과 현관을 구성한 기법 등으로 볼 때, 서양식 과 일본식의 건축기법이 모두 가미되어 있다. 구한말․일제시기의 우리 한옥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있어 서울시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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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5층 석탑 (정삼태 동문 기증)
이 석탑은 원래 전북 군산 지역의 폐사지에 있던 고려시대 탑으로, 일본으로 반출되려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군산지역 폐사지에 남아있던 탑을 일제시기 한 일본인이 자신의 사택(私宅) 뜰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해방 후 일본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그의 집은 한 고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1972년 그 일본인이 다시 와 탑을 일본으로 반출해 가려고 포장을 마쳐 놓았다. 이 소식을 들은 동문 정삼태씨가 금액을 지불하고 탑의 반출을 막았다. 1993년 기증받아 현재 건국대학교 박물관 정면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탑처럼 세련된 아름다움은 없으나 고려시대 특유의 힘차고 질박한 멋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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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 (東國正韻, 국보 제142호)
조선 세종대에 신숙주(申叔舟, 1417∼1475), 박팽년(朴彭年, 1417∼1456)등이 왕명(王命)으로 편찬하여 1448년에 간행되었다. 총 6권 6책으로 된 활자본(活字本)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운서(韻書)로 중국 명나라의 운서인 <홍무정운>에 대비된다. '우리나라의 바른 음'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편찬에 참여한 사람은 신숙주와 박팽년을 제외하고 최항(崔恒, 1409~1474), 성삼문(成三問, 1418∼1456), 이개(李塏, 1417∼1456), 강희안(姜希顔, 1417∼1464), 이현로(李賢老, ?~1453), 조변안(曺變安, 1413∼1473), 김증(金曾, 1413∼1456) 등 아홉 명이다.
동국정운은 우리나라 최초로 한자음을 우리의 음으로 표기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고 있으며, 국어 연구 자료로서의 중요성도 <훈민정음>과 쌍벽을 이룰 정도로 높이 평가되고 있어 한자음의 음운 체계 연구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훈민정음의 제자(制字)배경이나 음운 체계, 그리고 각 자모(子母)의 음가(音價)연구에 있어서 기본 자료의 성격을 지니는 귀중한 책이다. 그러나 <홍무정운>에 나타난 원칙을 지나치게 중시한 결과, 다분히 우리의 현실과 맞지 않는 요소가 작용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동국정운의 한자음은 주로 불경언해(佛經諺解)에서만 주음(注音)으로 사용되다가 1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그 사용이 전면 폐지되어 1527년(중종22)에 간행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없기에 이르렀다.
현재 건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6권 6책의 전질은, 조선 중종대의 문신인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의 수택본(手澤本)으로, 1972년 강릉에 거주하는 심교만(沈敎萬)댁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낙질(落帙)로 제1권과 제6권 두 책만 전해져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었다(국보 제71호). 6권 전질을 소장하고 있는 곳은 건국대학교 박물관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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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선생가 분재기 (栗谷 李珥 先生家 分財記, 보물 제477호)
율곡 이이 선생 집안의 재산 분배에 관한 기록이다. 율곡 이이(李珥, 1536~1583)는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퇴계 이황(李滉, 1501~1570)과 쌍벽을 이루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이며, 그의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 1504~1551)는 여류 명사(女流名士)였다.
재산 분배 문서인 분재기는 아버지가 죽기 전 직접 재산을 분배해 준 문서인 분급문기(分給文記)와, 아버지가 죽은 후 형제들이 모여 재산을 분배하는 화회문기(和會文記)가 있는데, 이 분재기는 화회문기에 속한다. 즉, 아버지가 죽은 후 형제들이 모여 재산을 분배한 문서인데, 그 기준은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규정을 따랐다. 먼저 제사 및 수묘(守墓)를 위한 토지와 노비를 배정하고, 나머지를 4남 3녀의 형제 자매 모두와 서모(庶母)인 권씨에게 분배한 토지, 노비 등을 구체적으로 적은 다음 끝에다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수결(手決)을 기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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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서북학회회관 (상허기념관 常虛紀念館,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3호)
현재 <건국대학교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상허기념관>은 건국대학교와 역사 함께 한 유서 깊은 건물이다. 1908년 항일민족운동단체인 ‘서북학회’의 회관으로 서울 종로구 낙원동에 지어졌다. 한일병합이후 서북학회가 해체되면서 오성학교, 협성실업학교 등 교육기관의 교사로 사용되다가 1941년, 건국대학교 설립자인 상허 유석창(劉錫昶, 1900~1972) 박사가 인수하였다.
해방 후에는 상허기념관에서 각종 정치 단체와 교육 기관이 창설되기도 하였으며, 1946년에 이 건물을 요람으로 하여 우리 대학교의 모체인 ‘조선정치학관’이 창립되었다.
상허기념관은 학교법인 사무실 등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1977년 낙원동 캠퍼스의 이전 계획에 따라 해체되어 1985년 현 위치인 서울 캠퍼스(광진구 화양동)로 이전, 복원되었다. 이전하면서 설립자의 교육 이념을 기리기 위하여 상허기념관으로 명명(命名)하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1층에는 ‘상허기념전시실’, 2층에는 ‘역사유물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이 건물의 역사적, 건축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문화재청으로부터 2003년 6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53호로 지정되었다. 박물관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경우는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는 ‘구 한국은행 본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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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궁 경원당 (都正宮 慶原堂, 서울시 민속자료 제9호)
이 집은 본래 1862년(철종 13) 역모 혐의로 사사된 왕실 종친 도정(都正) 이하전(李夏銓, 1842~1862)의 가옥으로 ‘도정궁’이라고 전해진다. 19세기 세도정치를 주도한 안동 김씨 일파는 종친으로 신망을 얻은 이하전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1862년 김순성(金順性)·이극선(李兢善)의 추대를 받아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사사되었다. 이듬해 철종이 사망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며 권력을 장악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하전이 억울하게 죽었다하여 그를 신원(伸寃)해 주었다. 이때 사택(私宅)이 있던 자리에 이하전의 제사를 받드는 사당으로서 이 건축물을 지어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하전은 경원군(慶原君)이 라는 군호(君號)가 추증(追贈)되었다.
가옥의 이름은 1970년대 이 집을 소유하고 있던 정재문 씨(현 국회의원)의 이름을 따 <사직동 정재문가>라고 명명되었으나, 이 건물의 유래와 연관하여 역사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도정궁 경원당(都正宮 慶原堂)>으로 개칭되었다.
건평 36.66평의 평면이 'ㄱ'자 형의 가옥이다. 벽체, 창호 처리과 현관을 구성한 기법 등으로 볼 때, 서양식과 일본식의 건축기법이 모두 가미되어 있다. 원래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사랑채만이 남아있다. 그 규모나 양식에서 전통적인 사대부 주택으로서의 면모를 찾을 수 없는 점을 볼 때, 기존의 건축물을 개축하였거나, 새로 신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래 종로구 사직동 262-85번지에 위치하다가 1979년 건국대학교 교정으로 이전됐다. 구한말․일제시기의 우리 한옥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민속자료로서 가치가 있어 서울시 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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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5층 석탑 (정삼태 동문 기증)
이 석탑은 원래 전북 군산 지역의 폐사된 절터에 있던 것으로 일제시기 한 일본인이 군산의 사택(私宅) 뜰에 옮겨 놓았던 것이다. 해방 후 일본인이 일본으로 건너가고, 그의 집은 한 고아원으로 사용되었는데, 1972년 그 일본인이 다시 와 탑을 일본으로 반출해 가려고 포장을 마쳐 놓았다.
이때 사업차 군산에 가있던, 건국대학교 동문 정삼태 씨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가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그는 일본인에게 그동안의 경비를 주고 탑을 입수하여 서울 종로구 누상동 집에 옮겨 놓았다. 정삼태 씨는 생전에 귀중한 문화재를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는 뜻을 자손들에게 얘기하였고, 자손들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1993년 고인의 모교인 건국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군산의 폐사지에 있을 때 이미 탑신(塔身)의 한 층과, 탑의 상륜부(上輪部)가 소실되었다. 5층이었던 것이 현재는 4층만 남아있고, 상륜부는 1970년대에 다시 만들어 올려놓았다. 비록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의 탑처럼 세련된 아름다움은 없으나 고려시대 특유의 힘차고 질박한 멋을 간직하고 있다. 한 인물의 뜻있는 행동으로 소중한 우리 문화재 해외 반출을 막은 귀중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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